엊그제 제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송화시장 근처에서 집으로 오려는데 갈림길에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어디로 가야 집에 갈 수 있나?” 마침 곁에 막내딸이 있어서 “어디로 가면 되잖아!” 그래서 조금 지나다보니 길을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매일 다닌 길도 잊어버리나? 당신은 좀 중증인 것 같은데, 어떻게 사시나?” 제가 아내의 건망증을 놀려댔습니다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그 문제가 사실은 내 문제요, 요즘 들어서 그 건망증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잊어버리는 것은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같은 나의 허물도 잊어버려주시고 추악한 죄악도 망각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삽니다. 하나님의 망각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나의 건망증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옷 갈아입다가 우연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 손에 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건망증 덕분에 골치 아팠던 사건이나 속상했던 일도 잊어버리고, 미웠던 사람, 상처받았던 일의 기억도 다 망각하게 되어, 평상심을 놓치지 않게 되니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건망증 때문에 당황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었다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기도 하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 교회사무실로 내려갔다가 무엇 하러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괜스레 “우편물 왔느냐?”고 물어보고 올라오기도 합니다. 서류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못해 몇 시간씩 찾고 고심하는 것은 예사이고,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성도님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난처해지거나 “이름이 어떻게 되죠?” 물을 수밖에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건망증의 손익을 계산해보면 아무래도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큰 것 같습니다. 특히 목회에는 큰 지장이 있습니다. “그 자료가 어느 책에 있었던가?” 그래서 찾다찾다 시간을 다 보냅니다. 혹 설교시에 사용했던 예화를 몇 번씩 되풀이해서 말한 것도 있지않나하는 의구심도 갖고 있습니다. 잘 잊어버리는 것이 천성적인 데다가 나이 탓도 있는 것 같아 (연세 많으신 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별 도리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 제가 잊어버려서는 안 될 부탁이 있으시면 구두로 말고 메모를 해서 서면으로 해주시고, 혹 제가 건망증으로 인해 실수를 하더라도 웃으며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내 건망증이 정말 큰 문제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건망증과 아무 관계가 없으시지만 십자가 뒤에 숨겨진 나의 허물을 부러 망각해 주신다고 생각하니 감사해서 “건망증에도 불구하고 배짱으로 살자”고 외쳐봅니다.
2007-04-01 12:1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