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것도 은혜
어느 날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아빠의 머리가 너무 훤하다.”고 합니다. 머리칼이 너무 빠져서 늙고 약해진 것 같아서 싫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 몸 약한 아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병들어 누워있거나 약한 아이들의 우수에 싸여 있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낭만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적에 제 소원(?)은 안경 쓰는 것이었습니다. 책 많이 읽어서 눈이라도 약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눈이 약해지지 않아서 안경을 쓰지 못했고, 콜라병 뚜껑을 이로 따내도 멀쩡할 만큼 치아까지도 건강했습니다. 얼굴은 못 났고, 머리도 안좋으면서 쓸데없이 몸만 건강한 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책을 읽으려면 무의식적으로 눈에서 멀리 띄게 되고, 돋보기를 안쓰면 읽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찬물을 마시면 이가 시리고 음식을 먹을때면 이가 음식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T.V를 보아도 불을 밝게 하고 보고, 이 닦을 때도 벅벅 문지르지 않고 살살 문대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나마 지금의 시력과 지금의 치아를 보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50중반에 이르러 성인병에 노출되고 이곳저곳이 고장 나고 약해진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헛되이 사용했던 것을 반성하게 됩니다. “나의 생애를 지금처럼 마음대로 살아선 안되겠구나.” 돌이켜 회개하고,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한 부분을 소중히 여기면서,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은혜 받고 철이 들어가는 듯합니다.
최근들어 내가 약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렇게 약해져서 아주 약해지면, 마침내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의존하게 될 것이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하나님나라로 안아 옮기겠구나 생각하니 감사가 넘치고, 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제와서야 바울의 말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는 고백이 이해될 듯합니다. 약한 것으로 인해 온전함에 이르게 된다면, 약한 그것도 은혜입니다.
2008-03-15 16: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