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마땅히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 표현이 천편일률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느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 자식 사이가 먼 것도, 사랑이 모자란 것도 아닙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친구처럼 말을 놓습니다. 그렇다고 존경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랑하고 존경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높여드리고 존경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존경의 표현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친구처럼, 어떤 사람은 권세있는 왕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표시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역경도 그냥 받아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쪽 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송명희 시인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간증하는데, 몸이 뒤틀리고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데 “공평하신 하나님,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자신의 신체장애를 축복으로 수용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적들이 교회에서 재현될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주셨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으니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상호 배척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이 양면이 다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기적을 기대해야 할 때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을 수용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이지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기적을 믿는 사람을 배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자신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두 신앙적 태도의 차이를 잘 알고, 양쪽으로 균형 갖춘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적적 역사를 믿습니다. 또한 이지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존중해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으로 힘있게 일하지만 왼손도 필요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