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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버지께 (남명모 장로의 글 전문)

발음교회 2012-05-06 12년전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버지께 
 
 
 
남명모
 
 
추수가 끝나가는 들판에서 송아지 한마리를 거느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누런 암소를 보니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 계시던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일만 있었는지, 지금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난날의 사연들이 가슴을 저며 옵니다.
 
우리 집에는 아홉 마지기 논이 있었지요? 그 논은 모두 천수답이라 가뭄이 들 때마다 온 식구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일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해마다 언 땅이 풀리기 무섭게 논둑부터 손질하셨지요. 한 방울의 빗물도 놓치지 않고 받아두기 위해서라는 것을 철이 든 후에야 알았습니다. 겨우내 얼어 부풀고, 들쥐가 구멍까지 뚫어 놓은 논두렁을 물이 새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라는 걸 어린저희는 몰랐습니다. 천수답은 크고 작은 다랑이가 여러 개라 꾸불꾸불 어지러이 늘어진 논둑을 아버지 혼자 보수하는데 한 달도 더 걸렸지요.
 
열 살 때인가, 아버지 점심을 가지고 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눈 녹은 차디찬 물에 맨발로 흙을 이기고 계시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표정 없이 논둑을 다지고 계셨습니다. 점심 보따리를 풀어보니 감자 여남은 개가 들어있었지요. 계절이 보릿고개라 감자나마 먹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인 때였으니까요. 아버지는 그중 한 개만 드시고
 
나는 배가 부르니 느그들이나 묵어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곧이듣고 그냥 가지고 와서 동생들과 시시덕거리며 나누어 먹었답니다. 자식들 입에 넣어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인데, 아무리 철없는 때라고는 하지만 진종일 무논에 발을 담그고 일하시는 아버지 배가 더 고프리라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요.
 
모가 한 뼘쯤 자라 본격적인 모내기철이 되면 천수답은 장대 같은 폭우가 내려주어야 모내기를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해에는 그 흔한 장마도 없었나 봐요. 봄부터 가을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었지요. 아버지가 공들여 만든 논둑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먼지가 풀풀 날리곤 했습니다.
 
추수철에 아버지를 따라 논에 가보니 못자리판은 제자리에서 말라비틀어져 쭉정이 이삭이 듬성듬성 솟아있을 뿐, 벼메뚜기만 소란스럽게 날아다녔습니다. 지각없는 저희는 메뚜기 잡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그 기막힌 상황에도 아버지는 표정이 없으셨습니다.
 
쌀 한 톨 거두지 못한 부모님은 여덟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산에서 도토리를 몇 가마니씩 따와 멍석에 말리곤 하셨지요. 허구한 날 끼니때마다 도토리 죽이라 형제들은 밥투정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곡기 없는 도토리 죽은 아이들 보드라운 몸이 받아들이지를 못한다고 하시며, 도토리와 섞어 먹일 알곡을 구하려 동분서주하셨지요. 결국, 다음 추수 때 까지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애지중지 기르던 황소를 팔고 마셨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부리는 소가 없으면 논밭을 갈 수 없어 당장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버지는 궁리 끝에, 부잣집에서 암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새끼를 낳으면 어미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송아지는 우리가 가지게 되는 배 메기소라 하셨지요. 빈 외양간에 잘생긴 암송아지가 들어오자 온가족이 기뻐하였고 어린 저도 꼴을 베어다 먹이며 소죽 쑤는 일도 열심히 거들었습니다.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새끼를 배게 되었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라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지요. 아침소죽을 가지고 외양간에 다녀온 아버지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소가 고삐를 끊고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아침밥도 드시지 않고 무작정 뛰어나가셨지요.
 
그렇게 나간 아버지는 한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우리 열 식구도 문을 열어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이튿날 새벽녘에야 이슬을 흠뻑 맞고 돌아온 아버지는 얼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송아지 데려올 때 남녘 사람의 소라는 말을 얼핏 들은 일이 떠올라 무턱대고 남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며 낯선 소 한 마리 못 봤느냐고 목청이 터지도록 묻고 또 물으며 가다 보니, 집에서 80 리나 되는 청하까지 내려가 용하게도 쇠전거리에서 우리 소를 찾았다 하셨지요.
 
소를 붙잡아놓은 패거리들이 소를 순순히 돌려주려고 했겠습니까. 두둑하게 사례를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었으나,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아버지는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패거리들은 아버지에게 갖은 욕설과 협박을 했지만,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자 결국 죄 없는 소의 머리통이며 궁둥짝을 사정없이 때려서 소에게 화풀이를 하고서야 돌려줬다고 했지요. 그 어떤 수모보다 새끼 밴 암소가 패거리에게 매를 맞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오죽 하셨겠습니까. 만삭의 소가 배를 맞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지요. 온종일 밥 한술 못 드시고 밤낮 꼬박 쉬지 않고 걸어오신 아버지는 며칠 동안 실성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다행히 소는 부드러운 콩잎부터 먹기 시작해 차차 거친 여물도 잘 먹어, 소가 별 탈 없는 듯한 모습에 아버지도 차츰 평정을 되찾아가셨지요.
 
임신기간이 사람과 같은 소는, 청하에 갔다 온 뒤 이상 징후가 보이더니 분만 예정일이 한 달도 더 남아 있건만 산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퇴비 더미 옆에 부드러운 짚을 깔고 새끼 받을 준비를 하셨지요. 어미 소는 산고가 힘겨운지 입에 거품을 흘리며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송아지는 뒷다리부터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넓적다리까지는 쉽게 나왔으나 그 이상 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 소를 달래며 송아지 뒷다리를 잡고 살짝 잡아 당겼지요. 그때야 얇은 포대기에 싸인 듯한 물체가 땅에 툭 떨어지더군요.
 
송아지는 태어나면 뒤뚱뒤뚱 일어나 어미젖을 빨아야 정상이라고들 하는데, 나물자루 엎어지듯 넘어진 송아지는 꿈쩍도 안 했지요. 사산이었습니다. 만삭의 소가 그 먼 길을 걸어온 데다, 패거리들에게 매까지 맞은 후유증이었겠지요. 고개를 숙인 채 죽은 송아지에서 눈을 떼질 못하시던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날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습니다. 바위처럼 무표정한 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그땐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아버지 가신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이 땅의 천수답은 수리 안전답으로 변모했고 소가 갈던 논밭은 기계가 대신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아버지 당신의 그 눈물, 그 사랑입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상상도 못하셨을 풍요로운 세상에서 맞는 풍성한 가을이건만, 이다지도 허기진 사람처럼 못내 허전한 것은, 아버지 당신이 사무치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20111030
아직도 철들지 못한 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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