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모
발음교회 원로장로
『수필 춘추』등단
수상 : 김포문학상(2007년)
제1회 경인지역 테마 편지쓰기대회 대상(2011년)
건 망 증
남명모
안경을 끼고도 안경을 찾아 헤매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건망증이 우리에게 뜻밖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20여 년 전, 대구에 있는 한 대학에 근무할 때 일이다. 개교기념일에 교직원들과 학생대표들이 강당에 모여 조촐하게 기념식을 하는 자리였다. 중요한 행사가 아닌지라 서무계장이 사회를 보게 되었다. 정년이 임박한 계장은 흰머리를 날리며 식순에 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국기에 대하야 갱례!”
계장의 굵직한 구령에 따라 모든 참석자들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주악 소리가 장엄하게 울리고, ‘바롯!’ 구령이 떨어져야 할 순서가 됐다. 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계장이 무슨 말인가 할듯 말듯 망설이는 모양으로 보아 ‘바로’라는 구령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 쉽고 흔한 단어가 그의 입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것을 생각하니 보는 사람이 더 조바심이 났다. 사회자가 허둥대자 식장이 웅성거렸다. 동료들은 빨리 구령을 하라고 얼굴을 찡긋거리며 사인을 보냈다. 주변의 재촉이 사회자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을 터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그 고약한 단어는 도무지 생각나질 않고,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사회자는 갑자기 비장한 모습으로 두 손을 치켜 올렸다 내려치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아이고 고마 내렸뿌소!"
"와아-하하하”
기념식장은 뒤집어 질 듯 웃음바다가 되었다. 근엄하기만 하던 총장의 입가에도 미소가 흘렀다. 축사를 하기위해 초청되었던 전임총장도, 지역유지 자격으로 참석한 동문들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던 날, 우린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그날 저녁 ‘계장을 위하여’ 위로 회식을 가졌다. ‘고마 내렸뿌소’를 안주 삼아 정말 배가 터지도록 웃었다.
경제는 침체되고, 최루탄 가스가 밤낮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게 하던 삭막한 시절에, 건망증 하나가 우리에게 보약과 같은 웃음을 선물해 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