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모
발음교회 원로장로
『수필 춘추』등단
수상 : 김포문학상(2007년)
제1회 경인지역 테마 편지쓰기대회 대상(2011년)
호미 한 자루
남명모
아내가 큰 횡재라도 만난 사람처럼, 바소쿠리 웃음으로 들어왔다. 말을 들어보니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건너편 들판에 논을 메워 밭으로 만든 곳 2000평이 있는데, 그 땅에 공짜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짓는 주말농장이 30평밖에 안되니 아내의 입이 벌어질 만도 했겠다. 하지만 주말농장만 해도 우리 집 푸성귀를 충당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뿐 아니라 소일거리로도 적당했기 때문에 나는 전혀 딴생각이 없었다.
한번 가보기나 하자는 성화에 못 이겨 문제의 밭으로 가보았다. 한삼덩굴, 명아주, 바랭이 같은 잡초가 뒤엉키고, 물 빠짐마저 좋지 않아 거의 쓸모없는 땅이었다. 제대로 된 물도랑 몇 개를 만들려면 포클레인으로도 한나절은 걸릴 듯한데, 아내가 호미 하나만 달랑 들고 나온 모양이 가관이었다. 그냥 돌아가자고 말려도 듣지 않고 주저앉아 풀을 뜯기 시작했다.
보다 못해 중앙에 배수로 하나를 대충 만들어 주기로 했다. 밭이 워낙 넓은데다 삽질마저 서툴러 도랑하나 만드는데 하루해가 다 갔다. 무리가 되었던지 다음날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선천성 척추분리증’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작년에도 허리를 다쳐 일주일 입원한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이 땅덩이 하나가 어떤 화근이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아내는 허리도 튼튼하고, 디스크나 관절에도 전혀 이상이 없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남편의 척추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며칠 뒤 TV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한 아주머니가 작심한 듯 일어나 남편 흉을 보기 시작했다. 제목이‘남편은 엄살쟁이’였다.
강원도에 야유회를 간 남편한테서 신음 섞인 전화가 왔다고 한다.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 갈비뼈 몇 대는 나갔을 거라며 빨리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초행길에다 운전마저 서툴러 네 시간이나 걸려 천신만고 끝에 야유회 장소에 도착했다. 물어물어 남편을 찾아보니 어이없게도 동료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근처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하더란다. 그랬으면 됐지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는 남편의 말에 또 한 번 기가 막혔다.
“돌팔이 같은 놈들! 서울 가서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 봐야 돼! 내가 무너지면 우리 집은 망해!”
여기까지 듣던 나는 무릎을 쳤다. 엄살은 때때로 큰 사고를 예방하고,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는 묘약이라는 사실이 방송의 요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엄살의 대열에 나도 끼어 보면 어떨까, 이제부터는 아내가 밭으로 가자고할 기미가 보이면 지레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떨어보자. 정말 효과가 있었다. 아내는 ‘전혀 도움이 안 돼는 사람’이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밭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그 무지막지한 밭을 아내 혼자 일구다 다치는 건 괜찮단 말인가. 그런 걱정 놓아도 된다. 아내의 장비가 오직 호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몸이 지치면 호미 달랑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뿐 아니겠는가. 아내는 밭에만 나가면 온갖 잡념도, 갱년기 우울증도 사라지고 기분이 창공을 찌른다니 그거야 말로 하늘이 내린 분복이다.
그 밭은 우리 아파트 앞쪽에 있어 등산용 망원경으로도 잘 보인다. 아내가 이웃 아주머니 둘을 꾀어 밭을 세 등분으로 나누어 풀을 뽑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여인네들이 2000평이 얼마나 너른 땅인지도 모른 채 찰거머리마냥 붙어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돌무더기로 만든 경계선을 보니 소꿉장난처럼 비뚤비뚤한 S자곡선이다. 아내는 여기에 콩을 심어, 농약도 안 치고, 유전자 조작도 없는 진짜 무공해 콩을 생산한다고 했다. 그 콩으로 콩자반도 만들고 콩나물도 기르며 메주도 직접 쑤겠다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늙어 갈수록 우리네 옛 방식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향수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아무튼 나는, 집에서 망원경으로나 내다보며 아내의 콩 농사를 응원하기로 했다. 때때로 비료나 한차례 씩 뿌려주고 계속 엄살을 부릴 작정이다. 내가 무너지면 아내에게도 이로울 게 없을 테니까.
며칠 후, 집에서 혼자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병원 응급실 간호사라 했다. 꼭두새벽에 풀을 뽑고 돌아오던 아내가 쓰러졌는데, 쓰러진 장소가 동네병원 앞이라 곧바로 휠체어에 실려 왔다는 전갈이다.
황급히 병원에 들어서보니 응급조치가 끝나가고 있었다. 병명은 부정맥(不整脈)이라 했다. 이미 많이 악화된 상태라, 수술하지 않고 방치하면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소견이었다. 동네병원에서는 간단한 조치만 할 수 있을 뿐, 세브란스처럼 규모가 큰 병원에서만 수술이 가능하다며 진료의뢰서를 챙겨주었다. 정작 엄살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내 쪽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아내를 부축해 병원을 나오는데, 간호사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것도 챙겨가세요.”
돌아보니 흙 묻은 호미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